여행 홈 :: 2013 발칸/동유럽

1.18(금) 모스타르(보스니아) - 사라예보

모스타르에서 사라예보로

게바라 : 간밤에 새로운 사람들이 옆방에 들어왔다. 아줌마 재간이 참 좋다. 사람들을 잘 물어 온다. 아침 4시에 일어나 닭죽 싸고 나머지를 먹었다. 어제 6리터짜리 물 사온 걸 다 썼다. 닭죽에 무한정 물이 들어간다. 5시에 짐을 다 챙겼다. 아줌마가 15분 쯤 오셨다. 우릴 터미널까지 태워다 주신다. 원한다면 사라예보에 '레지던트'라는 호스텔을 운영하시는 세야드 아저씨께 나오도록 연락을 해 놓겠다고 한다. 남편이 머리에 비녀를 꽂고 있으니 그걸 보고 찾도록 하겠단다. 비 오는데 고생하지 않고 가도록 숙소를 소개해 주신다니 다행이다. 인사드리고 헤어져 표를 샀다. 차비는 40마르크. 50유로 내니까 55마르크를 주었다.

대형버스의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짐을 다 가지고 타서 짐값은 내지 않았다. 국가 간 이동이 아니라 짐을 유심히 보지도 않는다. 6시에 출발.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이 탄다. 차가 산지를 지난다. 주변 풍경은 환상적이다. 설화가 핀 나무와 하얀 들판, 지붕이 가파른 집들이 어우러져 꿈에서나 볼 것 같은 모습들이다. 우리 말고 외국인은 없다. 여기 사는 현지인들은 밖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아마 눈이라면 지겨울 것이다.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시골 마을들이 산지에 펼쳐져 계속 이어지다가 넓은 지형이 나타나더니 사라예보. 예상보다 빠른 9시 전에 도착했다. 눈 쌓인 바닥이 질척하게 변해 걷기가 쉽지 않다. 일찍 도착한 탓인지 세야드 아저씨는 보이지 않는다. 베오그라드 가는 버스가 아침 6시에 있고 1인 47마르크라는 것만 확인하고 걷는다. 트램(1.6)을 타고 간다. 건물들에 폭격 받은 흑적들이 남아있다. 역사박물관은 문을 닫았다고 크게 붙여 놓았다. '트래블러즈 홈' 근처 길에 내렸다. 청계천 정도의 수로에 황색 물이 빠르게 흐른다. 눈 녹은 물이 흐르나 보다.

원하던 호스텔은 물어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길을 헤매다가 우연히 세야드 아저씨의 '레지덴스'를 발견했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우릴 데리러 나갔는데 이미 차가 도착해서 못 만나고 오셨단다. 숙비는 25유로. 욕실 딸린 방이 호텔 같다. 10시에 방에서 짐 풀고 닭죽을 먹는다. 아줌마가 아침 먹으러 내려오란다. 이런 시간에 아침을 먹으라고 하다니 신기하다. 식당에 피아노, 손으로 하는 게임 도구, 편안한 소파 등 멋진 레스토랑 같은 모습이다. 우유, 시리얼, 각종 잼과 버터, 빵, 1회용으로 된 바르는 햄도 있다. 내일 아침 6시 차를 탄다니까 미리 먹으라고 하는가 보다. 모든 것들이 호스텔 같지 않고 멋지다. 왜 호스텔이라고 이름을 붙였나 싶을 정도이다.

아나키 : 사라예보 가는 첫차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우리 배낭을 차 안으로 가지고 가 맨 뒷자리에 놓았다. 버스가 좀 낡은 편이었고 시트 몇 개는 고장 나 있었다. 나 어릴 때 시외버스가 이랬었는데. 나이 지긋한 차장이 검표하러 왔고 짐에 대해선 아무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마도 짐 검사 하지 않는 국내 노선이기에 짐표를 안 붙여도 되나 보다.

버스가 좀 달려서 7시쯤 되니까 사람들이 속속 올라타서 나중엔 버스의 절반정도 찼다. 여행자는 안보이는 것 같고 거의 출근차량이다.

사라예보로 가는 길은 험준한 산악지형이 많다. 거기에 줄곧 내린 눈으로 순백의 풍경이 계속 펼쳐진다. 어디에 서서 사진을 찍어도 작품이 될 듯한 풍경. 달리는 차 안이라 제대로 찍지는 못했다.

도시가 크다더니 트램이 다니는 광경을 보고도 30여분을 더 달려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우리나라의 전철처럼 도시외곽까지 연결되어 있다.버스에서 내리니 조금은 황량한 너른 공터다. 인포메이션에서 구도시인 바슈까르지야 가는 방법을 주워 듣고 트램을 타고 잠깐만에 구도시에 도착했다. 버스 터미널은 사라예보역과 붙어 있으며 트램1번을 타면 구시가인 바스카르지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다.  트램 티켓은 은 1.6마르크인데 표 판매대에서 사면 그값이지만 차에 타서 기사에게 구입하면 1.8마르크로 오른다.도시 대로를 따라 우리나라 청계천보다 약간 너른 운하가 뻗어 있고 운하 곳곳에 다리가 놓여 있다.

세르비아계 민족주의 조직인 '젊은 보스니아'단원이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살해함으로서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던 라틴다리도 그 중 하나다. (사실 숙소가려고 트램을 내린 곳에 있던 다리가 유명한 라틴다리였다. 아무 것도 모르고 다리 건너가서 트램표 어떻게 사느냐고 사람들에게 물어 보기도 하고...)

바슈까르지야 광장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숙소를 정하고 숙소에서 물어 터널박물관으로 향했다.

터널 박물관 (War tunnel 툰넬 스파사)

보스니아 전쟁 당시 세르비아군이 43개월 동안이나 사라예보를 봉쇄하여 일체 물자의 공급을 차단하고 외곽에서 무차별폭격을 했었고, 사라예보 시민들이 생존을 위해 유엔군 주둔지역까지 땅굴을 파 물자를 공급받았다는 슬픈 역사가 얽힌 터널. 사라예보 공항 활주로 아래를 통과하게 만든, 총길이 730m의 터널은, 지금은 20여m만 공개하고 작은 박물관을 만들어 두었다.

트램 3번을 타고 종점인 ildiz에 내려 부트미르 가는 32번을 물어서 탔다. 버스 안에서는 기사님께 부탁해 뒀다.

"플리즈 텔 미 앳 툰넬!"

발음을 여기 식으로 해야 알아듣는다. 마침 터널박물관 가는 길이 32번 종점이었고 부근 마을에 사시는분이 함께 내려 길을 일러 주셨다. 혼자 왔으면 못 찾는다. 아무 표지판이 없으니.

박물관에 가니 한 분이 나와 먼저 비디오를 보고 터널에 둘어 가 보고 박물관에 가라고 일러주셨다. 벙커처럼 된 방, 총알통을 의자 삼아 앉아 사라예보봉쇄폭격 당시의 비디오를 시청했다. 이건 광주항쟁때의 시가보다 더 하다. UN의 제재로 사라예보 진격을 못하게 된 세르비아군이 사라예보를 둘러싼 산에 진지를 두고 시내로 포격을 하는 거다. 민간인을 상대로 한 이런 행위를 어떻게 43개월 동안이나 방치해둘 수 있었는지. 그것도 이성이 지배한다는 1990년대에 말이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의사결정이 좌우되는 유엔의 맹점을 잘 알았던 세르비아 정부는 1991년~2008년에 걸친 유고슬라비아 전쟁 기간 동안 유엔의 경고에도 아랑곳 없이 이와 같은 반인권적 행위를 자행했던 거다.

터널은 사람 한명이 몸을 굽히고 들어가기 알맞은 크기다. 바닥에는 레일을 깔아 물자이동을 쉽게 했는데 비가 와 터널이 침수된 사진도 종종 보였다. 이 터널을 통해 550만kg의 음식물과 45만 리터의 연료가 사라예보로 공급되었다. 베트남의 구찌 터널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효과적인 게릴라전을 위한 터널이었지만 이곳은 순전히 민간인의 생존을 위한 터널이어서 더욱 가슴 아팠다.  돌아오는 길, 32번 버스기사님은 아까 올때의 그분이다. 반갑게 인사드리고 시내로 들어왔다.

게바라 : 10시 반에 숙소를 나섰다. 은행에서 환전하고 유로라인에서 내일 갈 표를 샀다. 신기하게 터미널보다 2마르크 씩 총 4가 싸다. 터미널 이용료가 빠져서 그런가. 아저씨의 정보 덕분에 표를 좀 싸게 샀다. 수로 건너편에서 트램 표를 사고 건너와 3번 트램을 탄다(좀 오래되었다 싶은 이 다리를 무심히 건너 다녔는데 2차 대전의 원인이 된 바로 라틴 다리였다. 정말 아담하다. 900만명이 죽게 된 비운의 사건을 만든 다리이다.).

트램 종점까지 가서 32번 버스 종점. 앞마을 길을 따라 걸으면 '터널 박물관'이다. 92년 세르비아가 사라예보를 3년 이상 봉쇄한 기간에 UN군 지역으로 땅굴을 판 곳이다. 800m 가량의 땅굴이 공항의 지하를 지나 해방지역과 연결되어 먹을 것을 몰래 공급 했던 곳이다. 10마르크를 내고 들어가면 당시 폭격 모습과 땅굴을 이용하던 상황을 비디오로 보여 준다. 무차별 폭격에 거리의 건물들이 불타고 사람들이 뛴다. '홀리데이 인' 호텔조차 폭격을 피하지 못해 불탄다. 광주의 상황이 3년 이상 계속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남자들이 무차별 죽어가고 여자들이 갖은 수모를 당하던 세상을 이 사람들은 버티어 냈다. 불과 20년도 안된 때의 일이다. 이들은 잘못이 없고 세르비아의 탐욕 때문에 벌어진 일로 그런 세월을 경험하다니. 박물관은 비교적 작고 단순하다. 당시 사람들이 굴을 파며 썼던 도구, 사진 등이 있다. 리차드 기어, 모건 프리만 등이 다녀 간 사진도 있다. 굴은 10여 미터 만 공개한다. 허리를 숙여야 하는 높이부터 키 정도의 공간까지. 레일을 깔아 수레로 필요한 물건을 담아 이동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정말 참담한 마음이 드는 곳이다.

다시 버스와 트램을 타고 돌아오다 대형 마트처럼 보이는 곳에 내렸다. 남편의 신발이 자꾸 새서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는지 가 보았다. 싼 물건을 파는 대형 매장이다. 트램을 타고 버스역 근처의 대형 몰에 내렸다. 유명 메이커들 상점이라서 살 만한 신이 없다. 올드 시티에 가려고 다시 트램을 탔다. 사람이 너무 많아 표를 찍지 못한 채 2정거장을 갔다. 검표원 오기 전에 그냥 내리자고 하고 얼른 내려 걷는다. 표 2장이 굳었다.

스타리 그라드

올드 시티(스타리 그라드)는 모스타르의 확대판이다. 차분하고 좋다. 골목마다 수공예품을 만들어 팔고 관광객이 많다. 오늘 다녀 온 이름과 같은 'tunnel'이라는 커피집에서 에스프레소와 보스니아 커피를 마셨다. 할아버지들 사랑방이다. 어려운 시절을 다 겪었을 할아버지들의 모습을 살핀다. 마음이 짠하다. 커피는 두 잔 합쳐서 1유로. 정말 싸다.

아나키 : 신발 밑창 쪽에 구멍이 났는지 물이 들어차 혹시나 신고 다닐 만한 신발이 있나 살펴 보려고 시내의 Alta 쇼핑몰에 가 봤지만 배낭여행자가 험히 쓸 물건은 없고 다들 비싸서 포기. 구시가지의 가죽신발 만드는 곳에서 수선할 수 있겠는지 물어 봤더니 안되겠단다. 그리고 이런다.

"유즈 플라스틱 백"

나도 이런 생각 안해 본게 아닌데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같다니 시도해 보기로 했다. 수면양말 신고 비닐봉지 감고 그 위에 양말을 신는다. 생각보다 미끄러지지도 않고 괜찮다. 비닐봉지 때문에 발에 땀이 차 발 젖는 건 매한가지였다 해도. 최소한 신발속 세균이랑 만날 기회가 없어지니 지저분한 발냄새는 덜해진다.

게바라 : 바슈까르지야는 버스터미널(역 앞)에서 약 30분정도 걷는 거리에 있다. 트램 바슈까르지야정류장에 내리면 곧바로 이슬람식의 바자르가 시작되어 갖가지 공예품들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먹을거리로 발칸식 숯불구이와 케밥집이 많고 간간이 만든음식을 진열해 놓고 파는 식당들도 보인다. 바슈까르지야 광장의 카페 투넬Tunel에 들어가자 카페주인이 환대한다. 지역주민들이 많이 찾는 듯 커피 열댓세트 (쟁반에 에스프레소나 터키커피포트와 물컵울 준비해 놓은것)가 바에 쌓여있다. 멋진 수염을 가른 주인은 들어온 사람들과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고, 사람들끼리 두런두런이야기하고. 그 풍경 속에 들어간 우리. 무척 진하고 맛있는 에스프레소 한잔에 겨우 1마르크(0.5유로). 커피는 생필품 취급인지 어디서나 싸고 맛,향이 뛰어나다.

골목길을 구경하고 예전에 대상들의 숙소로 쓰였던 건물도 본다. 가죽신발 만드는 가게에 들어가 남편 신발을 보여주며 고칠 수 있냐고 물었다. 못한단다. 가게에 있던 처녀들이나 아저씨 모두 비닐 봉투를 끼워서 타라고 한다. 모두 같이 웃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다 똑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식당에서 미트볼과 양배추 쌈밥 등을 먹었다. 맛이 별로다. 게다가 짠 빵을 준다. 수퍼에 들러 필요한 것 사고 나머지 돈은 재 환전했다. 그래도 남는 동전은 과일 사고 다진 고기를 구워 주는 케밥집에 갔다. 짜서 조금 먹다가 싸달라고 했다. 또 짠 빵이 생겼다.

오늘 먹거리들은 실패다. 숙소에서 씻고 남편이 소시지와 고기를 지져서 통에 담았다. 아저씨가 베오그라드의 스피릿호스텔을 소개해 주셨다. 내일 아침도 내려와서 먹고 가라고 하신다. 여러 가지로 고마운 분이다. 오늘 안 쓴 트램 표는 내일 아침에 써도 된다고 하신다. 일찍 자야겠다.

라틴 다리

아나키 : 보스니아를 통치하던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사라예보를 방문했을 때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독립단청년이 황태자를 저격, 사망하게 한 곳. 1차로 수류탄을 황태자가 탄 차에 던졌으나 황태자가 그것을 재빨리 주워 밖으로 던져 죽음을 모면했지만 이 사건으로 수행원과 운전기사가 다쳐서 그들을 문병가는 중 이 라틴다리에 잠시 멈춰 섰다 한다. 거사에 실패한 독립단청년이 마침 다리옆 식당에서 식사하던 중 황태자 일행을 보고 총으로 황태자를 저격했다.

이 사건이 1차세계대전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그 청년은 자신이 한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베오그라드 가는 유로라인 버스

사라예보 터미널에 도착해 베오그라드 가는 차편이 있는지 알아보니 하루에 한편, 새벽6시에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라예보 동부 루카비차 터미널(스릅스카 공화국영토)에서만 세르비아,몬테네그로,스릅스카공화국(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세르비아계 자치공화국) 각지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는데.  다행히 사라예보 중앙터미널에서도 한 편 생겼다. 유로라인 협력회사에서 운영하고 있고 47마르크였다.

(시내에 있는 유로라인 사무소에서 예매하니 45마르크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